00~03.
15년 8월 17일 마감.
첫 개인지
표지 : 시루떡님
캘리그라피 : 림님
드라마 실연 쇼콜라티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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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킨조에게 이별통보를 받았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간단하게 선고받은 ‘헤어지자’라는 말이 너무나도 쉽사리 나를 스쳐지나갔다. 한동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앉은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킨조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는지 덤덤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조여드는 듯 아팠다. 힘겨운 레이스를 끝난 후 따라오는 신체적인 고통과는 다른,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실에 조금씩 적응되자 ‘잡아야 해.’ 이성을 무시한 근거 없는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나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킨조는 나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정이었다.
덤덤하고 정직한 눈빛. 자신감이 쑥 들어갔다. 킨조를 사랑하는 마음이 줄어든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여느 때보다 애가 타고 초조했다. 하지만 킨조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끝냈다. 내가 어떠한 말을 해도 그는 그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사랑했다. 오늘만큼은 그 모습이 조금 미워졌다. 답답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
“후쿠토미?”
킨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응.’ 하는 맥 빠진 대답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킨조는 나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다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길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겠지. 나는 입을 꾹 다물고선 고개를 숙였다. 때마침 탁상 위에 놓인 킨조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킨조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할 말이 있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케이스를 매만지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메시지의 수신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킨조를 배려해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정말로 이제 더 이상 킨조를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없다면.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조용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를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아쉬움에 이렇게나마 시간을 끌 수밖에 없는 나를, 킨조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결국 점원이 다가와 폐점시간이라고 말하는 순간까지, 우리 둘은 카페에 남아있었다. 다 마시지 못한 커피가 머그컵 속에서 일렁였다. 나, 후쿠토미 주이치는 10년간 사귀어 왔던 킨조 신고와, 너무나도 손쉽게 헤어졌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의 집이나 그의 집으로 향했겠지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그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갈라섰다. 당연한 것이다. 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연인 사이가 아니다.
‘조만간 짐 정리하러 집에 들를게.’ 킨조의 냉혹하리만치 현실적인 말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기다릴게.’라는 말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것을 황급히 억누른 내가 웃기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쓰게 웃었다.
1.
고등학교시절, 서로를 알게 되었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되었다. 킨조 신고의 곁에는 내가 있었고, 나의 곁에는 킨조 신고가 있었다. 팀은 달랐고, 태어나서 자아를 형성하는 기간 동안 전혀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추구하는 가치와, 그 수단이 달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맹렬히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어렸던 것 같다. 페달을 밟고 골을 목표해서 달리는 것 이외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몰두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세계는-적어도 나는-자전거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상대를 원했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자전거와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자전거와 함께 대학을 졸업했다. 킨조는 무릎에 숨겨져 있는 작은 폭탄의 위험성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 대신 꽤나 커다란 회사에 무사히 입사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도쿄에 있는 회사 근처 맨션에 혼자 살고 있는 킨조는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순조롭게 그다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도쿄에서 계속 자전거를 타고 있다. 프로가 되어 팀에 들어갔고, 스폰서도 생겼다. 지금은 여러 대회를 바라보고 있다. 해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오긴 하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은 조정기간으로, 트레이닝과 집을 오가는 일상을 계속하고 있다. 착실하게 일주일동안 트레이닝을 하고, 주말에 시간이 비면 킨조와 함께 데이트 겸 사이클링을 한다. 킨조의 자전거 사랑은 로드를 그만두고도 여전해서, 실력이 조금 무뎌졌다고 하더라도 사이클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지만 어떻게든 이어져있다. 마치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들의 길을, 미래를 향한 올바른 코스를 살짝 알려준 것처럼, 순조롭게 서로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보이지 않는 자전거의 체인이 우리를 묶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물론, 고백한 것도 나고 언제 헤어져도 괜찮다고 말한 것도 나 자신이었다. 서로는 서로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었고, 우리는 그 사정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본 성인 남성.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일본이라는 사회에서는, 남자 둘이 당당하게 사랑을 나누기 불편하다. 주위의 눈도 있고. 겉으로는 상대방을 신경 쓰고 배려하려고 애를 쓰지만 뒤에서는 차마 언급하기 힘들 정도의 험담이 오고간다. 그래서 우리는 태연하게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드라이한 남자 사이에는 딱 이정도의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주위에도 느껴지도록. 사람들이 멋대로 그어둔 잣대 속에 맞추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정말로,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불을 켜자 바로 보이는 것은 소파 위에 정갈하게 개켜져있는 킨조의 잠옷이었다. 서로의 집을 자신의 집처럼 오갔기 때문에 이것 말고도 그의 물건이 꽤나 많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멍하니 잠옷을 바라보다가 거실의 불을 꺼버렸다. 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 침실의 문을 더듬어 열고는 흐릿하게 보이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멍하니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인은 두 바퀴를 이어주지 않는다. 체인과 이어져 있는 것은 뒷바퀴뿐이고, 페달을 밟으면 뒷바퀴의 추진력을 얻어 앞바퀴가 돌아간다. 체인은 나에게 박혀있었다. 내가 페달을 돌렸고, 킨조는-.
나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져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져서 다음날 오후에 눈이 떠졌다. 자연스럽게 오전연습을 빼먹게 되었다. 오후에도 연습이 있기 때문에 바로 가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다리가 현관문 밖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생전 처음으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습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괜찮아서 놀랐다. 먹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삼시 세끼 제대로 챙겨먹었고, 소파에 앉아서, 혹은 드러누워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정말 나답지 않구나. 가만히 눈을 꿈벅이며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게 조용한 휴대폰이 신경 쓰여서 벽에 걸려있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꺼냈더니, 무음으로 설정되어있었다. 킨조를 만날 때만큼은 아무런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설정해놓았던 것이다. 골치가 아파져 미간을 찌푸리고는 상단 바에 조잡하게 떠 있는 알림을 지워나갔다. 팀원들과 감독님이 보낸 부재중 기록 20개. 팀에 유난히 팀원들을 챙기는 녀석이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킨조의 연락이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구태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음성사서함에는 몸이라도 아프냐는 걱정 섞인 말이 들려왔다. 모두 체크한 다음, 적당하게 고른 메일의 답장으로 짧게 「실연했습니다.」라 보냈다. 휴대폰 확인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 금방 답장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감독이 내킬 때 나오래. 풀죽어 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하시더라. 내 생각에 풀죽어 있는 건 너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금방 털어 낼 거라 생각하지만... 우울한 게 너무 심해서 로드를 타기 싫을 때가 오면, 그때는 연습하러 와. 네 재능이 아깝다.」
토도보다 더 시끄러운 사람인데, 평소와는 사뭇 문자의 분위기가 달랐다. ‘차였냐www’ 한마디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걱정 받아서 기분이 묘했다. 정말 그 말대로, 딱히 풀이 죽지는 않았다. 만약에 킨조가 여자였고,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아니, 그런 ‘약속’을 했던 상대였다면, 할 수 있었던 존재였다면 풀이 죽었을까. 가만히 상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킨조는 단순히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남자사람 둘이 만났는데 이렇게까지 서로를 밑바닥까지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사랑은-했다.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얼굴을 보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껴안아서 킨조의 몸 특유의 무게감을 느끼고 싶다. 진지하고 솔직한 생각이다. 그 몸에 이젠 다른 여자가 안기는 건가. 불쑥 솟아난 시커먼 질투가 꿀럭이며 늘어나 폐를 억누르는 것처럼 메스꺼워졌다. 눈을 감고 그 질투를 뽑아내기 위해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내가 여자였다면, 킨조는 나를 선택했을까. 이상한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다면. 킨조에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당당하게 말하면서 새로 생긴 크레페 맛집 전단지를 들고 가자고 조르는 귀엽고 애교 많은 여자였다면, 킨조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고개를 돌리자 나를 책망하듯 바라보는 검은색 자이언트가 보였다. 지금까지 해온 자전거에 대한 열정이 그 상상을 부정했다. 지금의 나는 여자인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는 나의 꿈이고,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일상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열정과 노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놓는 것은 지금의 나 자신을 놓는 것이었다. 손등을 이마 위에 얹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오래간만에 흘린 눈물은 나 자신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리 멈췄다. 소파에서 일어나 탁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을 들었다. 벽에 걸린 달력 앞에 서서 종이를 서너 장, 뒤로 넘겼다. 수많은 숫자 중 눈에 띄는 두 자리 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펜을 들어 동그라미를 쳤다. 이 날의 날씨는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빨간 동그라미는 나에게 어떠한 표정도 지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 ‘킨조의 결혼식’이라고 적었다.
준비할 것이 생겼다. 일단, 마음부터 강하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강하다. 수도 없이 되뇌었던 좌우명을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넓은 거실에 조용히 울리다 사라지는 목소리가 꽤나 엉망으로 잠겨있었다.
나는 강하다. 로드에 한해서.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다음날 바로 로드를 탔다. 하루 연습을 쉬었다고 해서 몸이 둔해지지는 않았지만, 자전거 특유의 냄새와, 남자들로 가득한 뜨겁고 꿉꿉한 공기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이 들어 그만큼 더 연습에 열중했다. 팀원과 감독 모두 처음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곧 ‘역시 후쿠토미’ 라는 풍의 말을 하며 어깨를 다독이고 지나갔다. 곧 ‘후쿠토미 주이치’를 찬 굉장한 여자친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토론이 팀 사이를 맴돌았고,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꽤나, 괜찮아 보이는 구나. 아라키타의 ‘철가면’이라는 호칭이 이제야 실감났다.
3.
평소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킨조라는 커다란 존재가 일상에서 빠지고 나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트레이닝이 끝나고 난 후부터는 넘치는 시간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평소에는 킨조를 만나러 갔었다. 만날 수 없을 때는 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보내는 것에 아무런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길을 잃었다. 항상 가던 길인데, 표지판이 갑작스럽게 뽑힌 것이다. 나는 방향치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체육관을 나서서 팀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면 목적지를 정하는 첫 번째 한걸음을 떼기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결국은 항상 집으로 돌아가지만, 이런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가는 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약간 춥고, 간판이 화려하다. 킨조와 같이 걷던 거리와는 다른 거리를 나는 선택해서 걸었다. 그를 잊는 게 쉬워지지는 않았지만, 체육관에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나. 혼자 사는 맨션의 입구를 발견하면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아 두어 번 더 확인하고 들어간다. 이렇게 조금씩 혼자가 익숙해지게 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킨조에게서 이어진 친구의 끈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놓는다 하더라도 이미 킨조에 의해 이어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끊을 수 있을 리 없다. 정말 우리 두 사람은 귀찮은 일을 벌였다. 쓰레기통이 처음부터 없었던 방 안에서, 어지를 정도로 어질러 놓고 방치하고 있는 격이다. 아니, 킨조는 나름대로 정리정돈을 하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나는 이것들을 모두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는 방 안에 벌려진 모든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것’들의 마지막 처리를 나에게 맡기고 자기만의 방을 찾아 떠난 것이다. 최악의 룸메이트다. 하지만 결국 그런 룸메이트를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어쩔 수 없이 눈에 밟히는 킨조의 물건들-칫솔이나 잠옷이나 컵이나 옷가지들-을 보면서 항상 언젠가는 이것들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정리해서 갖다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킨조가 물건들을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벌써 헤어진 지 2주일이 넘어가지만, 도망치지 않는 킨조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고 싶은 나의 작은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 정리하기 두렵다는 이유도 있다. 이별과 마주보는 것. 그것이 쉽게 되지 않는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미 시작된 레이스에서 2시간 있다가 출발한 것과 같다.
하지만 마음이 아직 죽지 않았고,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습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괴리에서 오는 고통은 꽤나 크다.
킨조와 하는 연락이 갑작스럽게 줄어들면서 휴대폰이 울리는 횟수도 그만큼 줄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은 마음 졸이는 일이고, 여러모로 체력이 소비되는 일이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연락을 해준다는 사실 자체로 힘을 얻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 상대조차 없는 상황에 맞이하게 되었을 때는 누구든지 연락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딱히 외로움을 잘 타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는 연락 하나하나가 반가워지고 소중해진다. 킨조에게서 오던 메일도 물론 소중했지만, 일상의 일부였기 때문에 더욱 포근하고, 익숙하게 다가왔다. 반가움은 이미 9년 전에 졸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항상 달콤하거나, 따뜻했을 터인데, 지금 되새겨보니 묘하게 씁쓸했다. 예전에는 행여나 킨조의 연락을 놓칠까 집에 오자마자 휴대폰 충전기를 찾았다. 지금 내 휴대폰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물을 마시면서 한손으로 액정을 두드리니, 시간과 함께 40%남은 배터리양이 떠올랐다. 예전과는 다르게 초조해지거나 불안해지지 않았다. 이젠 나도 이별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아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킨조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발전이었다. 빈 컵을 식탁위에 놓을 때, 휴대폰이 울리면서 아직 꺼지지 않은 액정 위에 메시지 한 개가 떴다. 갑자기 솟구쳐 오른 긴장감에 컵을 쓰러뜨릴 뻔했다. 이 시간에 올만한 메시지는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머뭇거리는 손을 들어 액정을 두들겼다. 긴장감은 곧 작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반가움이 연하게 퍼지다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