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mate 02
이어주신 글에서 다시 이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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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그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지, 트리스탄의 기억은 애매했다. 우연히 그와 마주친 후, 마치 연락하라는 듯 보여준 명함의 연락처가 뇌리에 계속남아 인간의 문물에 적응하는 김에 그에게 전화를 걸자, 너무나 허무하게도 ‘고객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맞이한 기억만은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때는 얘가 나를 놀리나 하고 생각했어.”
“한두 번 전화가 끊어진 것 가지고 낙담하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다시 걸었을 때 자기는 자고 있었으면서.’ 상냥하게 대꾸하는 슈리의 목소리에 트리스탄은 입술을 죽 내밀고 대답을 회피하듯 시선을 외면했다.
느긋한 두 뱀파이어의 대화는 때마침 불어오는 찬바람에 자연스레 끊겼다. 도시의 밝은 야경이 보이는 발코니. 트리스탄은 폭신한 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 목재 흔들의자에 웅크리듯 앉아 앞뒤로 천천히 무게중심을 옮기며 철제 울타리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혹시 무언가 일이 생겨 수개월동안 연락이 계속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즐겁게 받아들일 거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머릿속을 엿본 트리스탄은 눈을 깜박거리며 의식적으로 그 습관을 그만두었다. 혈액팩에 꽂힌 빨대를 입술 사이로 들이밀었다. 산소가 들어가서 그런가, 빨아 넘기는 피가 걸쭉해졌다. 목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익숙한 철 냄새를 도로 들이마시며 트리스탄은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혈액 팩을 구겨 손에 쥐었다.
찬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두 뱀파이어에게 추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에 휘날린 오른쪽 머리칼이 볼을 간질였다. 양쪽 머리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트리스탄은 이럴 때 말고는 잘 자각하지 못했다. 앞머리가 없는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매만진 후, 간지러운 볼을 더듬었다가 거추장스러운 오른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겨 고정시켰다.
땅을 바라보면 자동차가 활기차게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하늘을 바라보면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낮보다는 조용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시끄러운 밤은 조금씩 트리스탄의 잠을 설치게 했다. 졸음의 묵직함은 익숙했지만 흘러가는 세월에서 느껴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은 생각만큼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 혼자만을 놔두고 다른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찬란한 미래의 건너편으로 생을 갈구하며. 그것을 자각할 때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외로움은. 이전에는 이정도로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더라.
문득 자신의 곁에 누군가 있나 알고 싶어 트리스탄은 고개를 돌렸다. 알고는 있지만-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내려온 것 같은 검은 머리에 검붉은 눈동자는 자신처럼 야경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맞춰왔다.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그가 머리를 잘랐다는 것을 눈치 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 같았는데. 이불 속에 푹 파묻혀있던 트리스탄의 핏기 없는 손이 뻗어져 슈리의 등허리 부근의 허공을 더듬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허공을 휘적이는 트리스탄의 모습은 어딘가 고양이 같은 모습이 담겨있어, 행동을 관찰하던 슈리의 눈이 작게 빛났다. 트리스탄은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슈리의 긴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내리다, 그것이 세월 탓에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된 그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각을 볼 정도로 늙진 않은 것 같은데. 느릿하게 생각하며 트리스탄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슈리를, 지금의 슈리를, 노을빛의 눈동자를 깜박이며, 다시금 눈에 담았다.
*
“그러고 보니,”
오래 이어지던, 기분 좋을 정도로 고요했던 정적 사이로 슈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퍼졌다.
“이전에 이 나라로 왔을 때 공항에서 무언가 했어요 우리 자기?”
“응? 응. 비행기 좀 움직여봤어. 움직일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
“.......”
‘나 오늘 양치했어.’ 와 비슷한 어조로 대답하는 트리스탄의 덤덤한 표정을 바라보던 슈리는 그저 미소 지었다.
어느 공항의 CCTV에서 우연히 발견된 의문의 영상이 인터넷상에서 소란이 되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슈리는 ‘신기한 일도 있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날은 자신과 리스가 이 공항에 간 날이었고, 마치 무언가에 끌려가듯 움직이다 멈춘 비행기는-무인비행기라 인간에게 간 피해는 매우 적었지만-누가 봐도 평범한 현상이 아니라 혹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더랬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것도 매우 당연한 것처럼. 아무 생각도 안하고 지내는 것 같은 저 들고양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하는 까마득한 생각이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그저 방긋 미소를 짓고 있으려니, 똑똑한 들고양이는 알아서 제 생각을 읽고는 자신의 몸을 덮은 이불속에 더욱 파고들것처럼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네가 애써서 뒤처리 해주지 않아도... 인간은 말이 되지 않는 걸 보았을 때 멋대로 머릿속으로 보정해버려. 알고 있잖아?”
“.......”
“그리고 혹시나 사진이나 영상이 찍혔다 하더라도 원령특집 방송 같은 걸로 다뤄질 뿐이야. 아무것도 걱정 할 필요는 없는 걸.”
“리스, 저는 그저 자기가 걱정되는 것뿐이에요. 어쩌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지면 큰일이니까.”
우리에겐 ‘신상’이라고 할 만한 게 없잖아. 트리스탄은 그렇게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왠지모르게 그래야 할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조심할게.”
‘여러모로 귀찮아지는 건 싫으니까.’ 트리스탄은 덧붙였다. 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착한 아이네요.”
“나는 우리 자기의 가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장난기가 담긴 슈리의 말에 트리스탄은 국어책 읽듯 대답했다.
어디서 그런 기특한 말을 알아왔을까. 슈리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