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학교 AU설정
아카시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건 어렸을 때부터였다. 단순하게 일반교양의 한 종목으로서 바이올린을 잡은 그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왔다. 바이올린을 잡는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교양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술학교에 들어가서도 아카시의 성적은 최 상위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학생과 선생들은 그의 실력을 인정했고, 아카시는 그것을 당연하다 여겼다.하지만 그에게 닥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는 그에 어울리는 반주자가 필요하다. 그의 연주를 완벽하게 뒤에서 받혀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한 개의 곡을 같이 만들어나가야 하지만 절대 솔로보다 눈에 띄면 안 되는, 마치 그림자와도 같은 파트너. 아카시는 그런 반주자를 원했다.
최 상위권에서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아카시를 선망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많았고 그와 함께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에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상위권 학생들은 아카시의 반주자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자신도 앞으로 나가서 아카시와 어깨를 마주하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다. 아카시는 그것이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선생들도 이런 아카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동등한 실력을 가진 학생을 곁에 붙이려 해 보았지만 오히려 상극이 되어 돌아설 뿐이었다. 아카시는 자신을 완벽히 보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자신의 분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중에는 아카시의 눈에 차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아래 수준의 학생들은 실력 자체가 맞질 않으니 논외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파트너를 찾지 못한 채 학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겨울이 꽁무니를 감추고 점점 봉에게 밀려 쌀쌀함만 남았다. 실기시험을 위해서라도 파트너를 구해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걱정 어린 말을 들은 아카시는 조금은 언짢은 표정으로 복도를 걷다가 아무도 없을 때 고개를 숙였다. 승자의 위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맞지 않는 사람과 같은 무대에 설 생각도 없었다. 고민이었다. 학교 커리큘럼 상, 다른 학생과 호흡을 맞추는 시험은 꼭 봐야하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인 데다가, 도망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쾅. 커다란 소리가 갑자기 들려 퍼뜩 눈을 들었다. 이어 들리는 건반소리. 손가락이 건반을 타고 내려오며 정확하게 음을 자아내는 깔끔한, 빠른,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소리. 땅벌의 소리. 림스키코르사프의 왕벌의 비행. 유명한 곡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습하고 있는 곡이었고, 아카시 자신도 바이올린으로 마스터한지 오래인 곡이었다. 양손으로 현란하게 건반을 긁으며 기교를 과시하기 매우 쉬운 곡. 그만큼 고난이도의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은 어딘가 달랐다. 마치 초등학생이 치는 것처럼, 어려운 기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확했다. 콩쿨에 나간다면 대상을 탈 만한 실력. 강약조절이 정확했고 센스도 있었다. 테크닉만으로 보자면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들 중 상위권은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기본적으로 음악과 소리와 공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흥미가 생긴 아카시는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빈 교실의 문을 열었다. 뒷문이었다. 창문의 커튼을 모두 닫았기 때문에 교탁 옆에 있는 피아노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카시가 들어가자 피아노의 소리는 뚝 멈췄다. 아카시는 숨을 죽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피아노를 건드리고 간 것처럼, 공기는 잠잠했고 책상은 가지런했다. 아카시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있다. 그의 붉은 눈이 빛났다.
“누구?”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그의 어조는 매우 당당했다. 나는 네가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어. 그는입을 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작은 침묵 이후, 조용한 목소리가 피아노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아카시군?”
“호오, 나를 아는 거야? 신기한걸.”
“그야, 입학하자마자 학년을 초월해서 교내 1등을 도맡아 하니까요. 유명해요. 아카시군.”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상대와 대화를 하는 아카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어둠속의 그 상대도 매우 자연스럽게 아카시를 응대했다. 자신이 얼마나 이 학교에서 유명한지 이미 알고 있었던 아카시는 자신을 보고 이렇게 태연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처음이었기에 더욱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나와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래? 여기선 네가 잘 보이지 않아.”
“연습 중이었습니다만......”
대답과는 다르게 피아노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화가 바닥을 살며시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아카시는 알비노에 걸린 것처럼 흐릿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의 동공이 커졌다.
“이름은?”
“3군의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너. 반주 해본 적 있어?”
“네?”
커다랗고 둥근 눈매가 순진하게 자신을 올려다본다. 아카시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아까전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소유욕이 올라온 것인지는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3군이지만, 자신은 이 사람을 1군으로 올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팽팽하게 돌아가 결론에 도달한 아카시의 두뇌와는 다르게 아직 상황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쿠로코는 눈을 꿈벅 거리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귀여워 보여 아카시는 손을 들어 살짝 그의 볼을 쓸었다. 말랑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쿠로코는 저항하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찌간느. 연습 해본 적 있어?”
“조금은.......”
“그럼 그걸로 하자.”
아카시는 교실의 불을 켜고 어깨에 매고 있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직까지도 머뭇거리는 쿠로코를 바라보고, 아카시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너를 선택했어. 테츠야. 너는 이제 나의 것이야.”
쿠로코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오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어색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빛이 자신을 관통할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쿠로코는 자신의 처지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아카시의 제안은 자신에게는 신데렐라스토리였다. 그는 그것을 거절할만할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쿠로코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카시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두 가지의 선율이 얽혀 하나가 되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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